2020년 2월 20일 목요일

"Mark"와 "Smark"

북미 레슬링 팬덤의 은어 중 "Mark"가 있습니다. 대략 '스토리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순진한 팬들'을 일컫는 비하 표현입니다. 동사 활용으로 "marking out"이 있습니다. ("헐. 나 타나하시 직접 보고서 mark out 했어!")

"Smark"는 "Smart mark"의 준말입니다. 요컨대 지들은 똑똑하다는 얘기입니다. 레슬링 캐릭터와 레슬러를 구분할줄 알고, 스토리와 백스테이지 상황을 구분할줄 알고, 케이페이브를 보다 '어른스러운' 관점에서 즐길 수 있다는거죠.


사실 두 용어 모두 본래는 멸칭이기는 합니다만, 맥락을 떠나서 위 두 명칭은 프로레슬링 팬들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면모 모두를 즐길 수 있는게 프로레슬링 팬으로서 즐거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 1월 5일 열린 레슬킹덤14 2일차는 충격적인 결말로 끝났습니다. 지난 몇 년간 팬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바로 그 순간이 그 직전에, 정말 바로 그 직전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도쿄돔 메인 이벤트의 승자인 나이토 테츠야는 결국 마지막 "로스 인고베르나블레스 데! 하! 폰!"을 끝내지 못한채 KENTA의 난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영광스런 하나미치를 걸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런 XXX!"

먹먹한 심정으로 레슬킹덤을 시청하던 팬들 모두가 욱하면서 토해냈을 말입니다. 물론 그 대상은 그 빌어먹을 KENTA입니다.

하지만 우린 케이페이브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이건 모두 짜여진 대본대로 입니다. 그러면 욕을 먹어야할 사람은 퍼포머가 아닌 그 배후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게도 개XX!"


하지만 우린 또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도쿄돔 데하폰!'이 이루어지는 순간 '로스 인고베르나블레스 데 하폰'은 더이상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요. 이는 일찌기 케니 오메가가 WOR에서 넌지시 언급하기도 한 신일본 수뇌진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LIJ는 이걸로 2020년도 거뜬하겠구나. 신일본 수뇌진은 LIJ 머천다이즈가 2020년에도 잘 팔릴거라고 전망하는구나, 등등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팬들이 바라는 바로 그 스토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여전히 찜찜합니다.


"나는 나이토가 끝내 한을 푸는 모습을 보고 싶었단 말이야."


근데 이때 "나이토"가 누군가요? 도쿄 아다치 구에서 태어난 37세 나이토 테츠야 씨인가요? 아니면 "스타 더스트 지니어스"였으며 "제어불능의 카리스마"가 된 '나이토 테츠야'인가요?

저희는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의 주인공을 보며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를 보며 안타까워하지는 않습니다. 


프로레슬링은 묘합니다. 저흰 나이토 테츠야 씨와 레슬러 '나이토 테츠야'가 다르다는걸 알지만, 신일본 팬클럽의 일원이었으며 무토 케이지 그리고 타나하시 히로시를 존경했던 소년 나이토가 자라난 바로 그 나이토 테츠야의 역사를 알고 있기에 그와 '나이토 테츠야'를 겹쳐봅니다. 그래서 안타까워하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약이 올라서 나이토 테츠야의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따라갈 것입니다



케이페이브가 깨진 시점에서 프로레슬링은 뭘까요? 많은 이들이 그 전망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그리고 실제로도 그 때문에 많은 팬들이 떠나가고 있는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케이페이브를 알면서, 현실의 레슬러와 스토리의 '레슬러'를 알면서 그 사이를 넘나드는 덕분에 우리는 Mark와 Smark라는 두 면모를 왔다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프로레슬링이야말로 제공해줄 수 있는 바로 그런 예술적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추상적인 관점에서 레슬킹덤의 결말을 보고 느낀 저 자신의 감정을 차근히 분석해보는 것 또한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도락이었습니다 


그치만 분명히 이 글을 올리고 어느 순간 부지불식에 저는 다시 한번 되뇌일게 분명합니다


"아, XX. 히데오 이타미 XXX."

(2020/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