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1일 토요일

코로나 시대의 레슬링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중단된 이후로 레슬링을 거의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타 단체를 거의 보지를 않아서요. 그러는 와중에 업계 존망의 위기 속에서 여러 단체들이 무관중 경기로 다양한 시도를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기는 곧 기회라는 옛말을 증명하듯, 신선한 시도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눈에 띈 것은 3월 29일 프로레슬링 NOAH의 시오자키 고 대 후지타 카즈유키의 경기, 그리고 4월 4일 WWE레슬매니아의 언더테이커 대 AJ 스타일스 경기입니다. 프로레슬링의 상례와 너무나도 다른 이 두 경기는 서로 정반대 방향에으로 벽을 뚤고 나갑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소리"에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시오자키 대 후지타 경기의 전반 30분, 언제든 달려들 자세만을 취한채 두 레슬러가 상대를 노려볼 뿐이었던 그 30분이 많은 일본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무사물의 정취를 노렸다는 것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소위 '정중동' 속에서 검을 든채 미동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두 무사. 풀이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소리만 나던중, 불현듯 달빛에 검광이 비치고 진검승부가 나며 한 무사는 그대로 쓰러지는 모습. 이런 모습이 얼마나 고증에 충실한지는 둘째치고 이런 서사가 그네들, 특히나 레슬링의 전통적인 일본인 팬들에게 어떻게 비쳐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카메라 찰칵이는 소리, 타임 키퍼의 호명, 간간히 들려오는 레프리와 세컨드의 재촉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경기장을 지배하는 것은 정적입니다. 일본식 무사물에 비유컨대, 보통의 레슬링 시합이 영주와 관중들 앞에서 벌어지는 대낮의 어전 시합이라면, 무관중 경기장에서 두 레슬러가 벌이는 경기는 달밤처럼 어두운 관중석을 뒤로 한 정적 속의 경기입니다. 여러 색이 어우러진 모자이크보다도 단색의 평면이 더 꽉 차보일 수 있는 것처럼, 시오자키 대 후지타 경기는 그 정적을 통해 경기장을 메웠습니다.


언더테이커 대 AJ 스타일스의 경기는 루차 언더그라운드, 매트 하디가 딜리트 기믹을 통해 보인 여러 실험적 시도를 과감하게 스크린에 펼쳐냈습니다. 그 영화적인 연출도 연출이지만, 제가 주목한 것은 또 한번 그 '소리'였습니다. 관중들의 반응이 부재한 자리를 채우는 것은 경기라는 틀 하에서도 여전히 부각되는 대사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배경음악이었습니다.

배경음악은 허구 세계의 구성요소입니다. 우리네들 삶에 비극은 허다하지만 그때마다 비장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던가 하지 않습니다. 보통의 프로레슬링 경기에서 입장씬은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며, 그렇기에 레슬링 경기에서 입장씬은 귀중합니다. 본 시합은 그런 발상을 한없이 늘인 연장입니다.

관중들의 성원과 해설이 사라진 캔버스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대사와 효과음, 그리고 배경음악입니다.언더테이커가 '작업'을 마친 것과 동시에 종소리가 울리는 그 세계는 이미 현실과는 일별한 세계이며, 이로써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재료로 이루어진 무언가임을 선언합니다.


변화가 없는 예술은 결국 조금씩 조금씩 스러져 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 위기로 인해 레슬링계 역시 마찬가지로 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만, 그런 한계 덕분에 이런 전위적 시도를 보는 것은 팬으로서 기쁜 일입니다.

(2020-04-05)